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예술 == 고대 이집트 언어에는 '예술'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다. 당시 이집트에서 예술이란 신과 파라오를 섬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현대미술]]처럼 예술 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았기에 예술을 뜻하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고대 이집트 예술은 순수 미술이 아니라 대부분이 신과 관련된 종교 예술이거나 왕을 찬양하는 왕실 미술에 한정되었다. 주제가 모조리 이런 것들이었으니 당연스레 엄숙하고 장엄한, 그리고 틀에 맞춰진 양식의 예술들이 발전했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 중에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작가 자신의 느낌을 묘사하는 내용의 예술품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utankhamunsarcophagus.jpg|width=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114dbc41829261d23dad493dc0e9dc4.jpg|width=27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8279099_1814234315543642_9097826608836175950_n.jpg|width=265]]}}}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00px-Paris_-_Toutânkhamon,_le_Trésor_du_Pharaon_-_Pendentif_au_faucon_portant_le_disque_solaire_-_001-gradient.jpg|width=300]]}}} || || '''{{{#A0522D [[투탕카멘|{{{#A0522D 투탕카멘}}}]]의 관}}}''' || '''{{{#A0522D [[사자의 서|{{{#A0522D 사자의 서}}}]][* 왼쪽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각각 [[이시스]], [[오시리스]], 파라오, [[호루스]]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초록빛 피부로, 호루스를 매의 머리를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 '''{{{#A0522D 투탕카멘의 왕좌}}}''' || '''{{{#A0522D 호루스의 목걸이}}}''' || 이집트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사람 얼굴은 측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몸은 정면을, 다리는 다시 측면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인체의 비율도 이미 양식이 딱딱 맞추어져 있어서 바닥부터 이마의 머리 라인까지, 얼굴부터 어깨까지 등 모든 비율이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다만 이 비율은 파라오나 그림의 주인공처럼 중요한 인물에만 적용했던 것이지 전쟁에서 잡힌 포로나 하인 같은 경우에는 비율이 맞지 않았다.] 회화 속 인물의 자세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수많은 벽화들을 뒤져봐도 거의 서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거나, 앉아 있거나 그런 자세들 밖에 없다. 또한 남자의 경우 왼쪽 발을 앞으로 뻗은 상태로, 여자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게 그렸다.[* [[심장]]이 위치한 왼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왼쪽 발을 내미는 것은 남성의 강인함과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반대로 여성은 내조와 차분함을 중시했기에 가지런하게 발을 모은 자세로 그렸다.] 인물을 그릴 때 인물만의 개인적인 특성을 살려 그리지도 않았다. 벽화 속 그려진 [[파라오]]들의 얼굴을 봐도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 대신 그 위에 왕명을 새겨넣거나 장식품들을 통해서 그 인물이 누군지를 알려주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굳이 모든 그림을 2차원적으로 그린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사실주의]]보다는 인체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만 따서 그리는 걸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예술가들은 일종의 모사가였다. 창조신 [[프타]]가 만든 세계를 복제해 표현하는 일종의 복제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 전체를 표현하는 예술가로서는, 사람 개개인의 특성을 하나하나 구현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핵심적인 특징, 예를 들어 팔다리나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개인의 모습은 최대한 간략화해 그린 대신에, 그 옆의 글과 그림들을 통하여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세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려 시도했다. 그 외에도 조각상을 깎을 때에 남성의 석상은 여성의 석상보다 더 어두운 색의 돌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석상이나 회화 너나없이 중요한 인물은 크게, 중요성이 떨어지는 인물은 상대적으로 더 작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이집트 회화는 굉장히 상징성이 강했다. 이집트에서는 4개의 색을 기본으로 해서 색을 칠했다. 검은색을 의미하는 '켐', 백색을 나타내는 '헤지', 초록색[* 푸른색도 함께 나타냈다.]을 상징하는 '와지', 붉은색 계통의 색을 주로 하는 '데셰르' 이렇게 4개의 색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 색깔들은 모두 각자 의미하는 뜻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푸른색이나 초록색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다. 때문에 풍요의 신 [[오시리스]]는 초록빛 피부를 가진 것으로 묘사했다. 검은색 역시 사후세계, 풍요와 나일 강을 상징했기에 주로 파라오들의 부장품을 검은색으로 많이 칠했다.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흑색 피부로 묘사되었으며, 죽은 왕의 조각상 역시 흑색 돌을 이용해 깎았다. 이집트인들은 [[금]]을 신들의 살로 보았고 [[은]]을 '백금'이라 부르며[* 우리가 아는 [[백금]]의 개념과는 다르다.] 신들의 뼈로 여겼다. 붉은색, 주황색 등 붉은 계통의 색들은 태양이나 사막의 신 [[세트(이집트 신화)|세트]]와 연관이 있었다. 파라오를 태양신으로 묘사할 때에 붉은 암석을 사용했으며, 세트의 석상에도 붉은빛 돌들을 애용했다. 이집트 도자기는 석상이나 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그 폭이 다양하며 예술성도 매우 뛰어나다. 대리석 가루와 석회석, 식물을 태운 재 따위로 만들었는데 이를 모두 섞은 뒤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구워서 제작했다. 최소한 [[이집트 선왕조]] 시기부터 도자기를 구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중왕국, 신왕국 시대를 거치며 도자기 제작 기술의 황금기를 찍었다. 도자기에 푸른 빛을 내게 하는 유약을 발라 구우면 아름다운 푸른 빛을 내도록 만들 수 있었는데, 이 푸른 색깔이 [[터키석]]이나 [[라피스 라줄리]]의 빛과 상당히 흡사했기에 비싼 보석들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대용품으로 이 도자기를 이용해 부장품을 만들거나 집을 장식하곤 했다. 푸른색뿐만 아니라 붉은색, 노란색 등 다른 색의 도자기도 구울 수는 있었지만 푸른색 도자기가 색감 면에서는 워낙 독보적이었기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푸른색이나 연녹색 색깔의 도자기를 가장 많이 만들었다. 도자기와 비슷한 [[유리]] 공예품도 많이 제작했다. 다만 유리를 불어 만드는 기술이 당시로서는 매우 고급 기술이었기에 신왕국에 해당하는 18왕조 초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유리 제품들이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자체는 굉장한 사치품이었으며, 왕실 일가나 대귀족 정도나 되어야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일반 평민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도자기와 유리를 만들 때 가장 많이 사용한 이집트식 염료가 바로 유명한 '이집션 블루'다. 대리석과 알칼리 물질을 섞어 만들었고, 눈에 잘 띄고 아름답다는 특징 덕분에 도자기, 유리 등 수많은 분야에 넣어 썼다. 금속 공예품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집트에서 가장 먼저 사용했던 금속은 [[구리]]로, 선왕조 시대부터 조물을 만들어 구리 제품들을 생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이미 어닐링[* 일정 온도 이상에 금속을 노출시켰다가 재결정화해 금속을 더욱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 냉각 및 망치질 기술이 보급되었으며 덕분에 이집트의 금속 주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집트의 구리 공예 기술은 고왕국 시대에 절정을 찍었고, 이후 황금이나 은, 청동 등 기타 금속들의 제련법이 등장하며 구리 외에도 여러 금속들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집트인들은 [[금]]을 최고의 광물로 쳤다. 시간이 흘러도 부식되거나 변하지 않는 황금의 불변성을 신의 영원성과 결부시켜 금을 신성시했기 때문. 이집트인들은 황금을 신들의 살로 여겼고, 파라오의 관을 매장하는 무덤의 매장실을 '황금의 방'이라고 불렀다. 오벨리스크나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금으로 도금한 캡 스톤을 얹어 마무리했고, 신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상이나 제기들은 언제나 금으로 만들었다. [[은]]은 주로 [[레반트]] 지방에서 수입했다. 초기에는 은의 공급이 적어 심지어 금보다도 희귀한 금속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중동 지방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되면서 금보다 가치가 낮아졌다. 물론 은도 비싼 광물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고 금이 신들의 살이었다면 은은 신들의 뼈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에 마지막으로 등장한 광물이 바로 [[철(원소)|철]]이다. 그러나 [[이집트 말기 왕조|말기 왕조]] 시대까지 철기 제조법은 보급되지 않아 모조리 수입해서 사용했고, 철제 도구들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야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신을 숭배했던 이집트인들은 [[부적]]을 굉장히 좋아해 많이 지니고 다녔다. 가장 애용하던 부적은 라피스 라줄리나 황금으로 만든 [[스캐럽]], 혹은 호루스의 눈[*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표식들 중 하나. '우제트'라고도 하는데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상징했다.], 이시스의 매듭[* 사랑의 여신 [[이시스]]의 상징. 이집트어로는 '티엣'이라고 해서 여인들이 차고 다니던 허리띠 모양을 하고 있었다.] 등을 새겨 넣은 목걸이 등이었다. [[딱정벌레]]를 형상화한 스캐럽은 행운을 가져오고 반대로 액운을 막아준다고 해서 많이 쓰였는데, 특히 사후세계에 쓸 용도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의 법정으로 들어가 거대한 저울에 자신의 심장을 얹어 그 죄를 판결받는다고 했다. 한쪽에는 자신의 심장을, 다른 한쪽에는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을 얹었다. 죄를 많이 지을수록 심장이 무거워졌기에 만일 심장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그 사람은 지옥으로, 깃털 쪽으로 저울이 기울면 천국으로 가는 방식.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들도 사람이었던지라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했고, 자신이 죽어 지옥에 갈까 두려워했던 이집트인들은 미리 자신이 죽으면 심장 바로 위에 이 스캐럽 부적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유인 즉슨 이 스캐럽 부적이 심장의 죄를 묶어놓아 심장이 제 죄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 이집트인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이 스캐럽 부적만큼은 반드시 가지고 관에 묻혔다. 물론 파라오나 귀족들은 보석이나 황금으로 만든 스캐럽 부적을 가지고 묻혔지만 평민들은 흙이나 돌, 나무 따위의 스캐럽와 함께 관 속에 잠들었다. 스캐럽 부적 외에도 목걸이나 반지도 유행했다. 사람들은 신성한 황금이 악령을 몰아낸다고 믿었기에 금으로 만든 액세서리들을 많이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물론 금으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터키석, 라피스 라줄리, 은, 벽옥 등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을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